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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의 속사정> 영화 ‘궁합’- 조선시대의 공주들(上)
기사입력 2018-03-12 07:00:31.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왕의 딸들은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조선 최초의 부마간택
   
영화 \'궁합\'의 송화옹주 스틸컷

 

  영조 29년.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조정에서는 음양의 조화가 흐트러진 게 원인이라며 박색으로 유명한 송화옹주(심은경)를 빨리 시집보내야 음양의 조화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이에 영조(김상경)는 온 백성을 상대로 부마 간택을 명하고, 왕의 사위가 되고 싶은 조선 팔도의 남자들이 한양으로 대거 몰려와 지원한다.

스토리만 봤을 때는 흥미롭고 마냥 우스운 일이만, 사실 이면을 들여다보면 냉혹하기 짝이 없다.‘음양의 조화’라는 명분같지도 않은 명분에 팔려 공주는 한마디 반항도 못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송화옹주의 삶은 약과다. 조선왕조 500년간 38명의 공주와 78명의 옹주(정비가 아닌 이에게서 낳은 딸)의 삶이 모두 결혼을 매개 삼아 정치적 도구로 사용됐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적 삶을 송두리째 희생당한 것이다.

영화의 소재가 된 ‘부마간택’이 최초로 시행된 것은 태종의 딸 정순공주 때부터다. 그런데 그 사연이 매우 기구하다.

태종 나이 38세에 본 막내딸 정선공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사이가 극도로 안좋을 때 태어나 출생시점(月·日)조차 명확하지가 않다. 아내에게 화가 난 아버지가 딸의 탄생 사실조차 신료들에게 알리지 않다 보니 실록에 기록이 남지 않은 탓이다.

그런 정순공주가 12세가 되자 태종은 혼처 물색에 나섰다. 이 즈음에 태종은 원경왕후의 친동생을 유배 보낸 상황이니 결혼에 어머니가 발언권도 행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태종이 처음에 염두에 둔 인물은 친구 이속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거절하자, 태종은 조선왕조 최초의 부마간택을 시행한다. 참고로 이속은 후에 태종에 의해 관노가 되었고, 그의 아들을 평생 총각으로 살다 죽었다.

아무튼 태종은 4~5품 이하 가문의 아들 중 부마를 골랐다. 말인즉 3품 이상 고관대작 가문은 제외했다는 얘기다. 막내 딸을 빌미로 정치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견제한 거다. 간택을 통해 선발된 주인공은 남휘다. 남휘는 과부의 아들임에도 최종 낙점됐다. 이유는 정치적인 면 때문이다. 태종은 남휘가 영의정의 손자이지만, 영의정이 이미 많이 늙었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임에 주목했다. 좋은 가문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최고의 사윗감이라 본 것이다.

부마가 확정되자 13세의 정선공주는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유모와 몸종 6명만 이끌고 남휘에게 하가(下家)했다. 위치는 태종이 거주하던 창덕궁 부근으로 50칸 이상의 대저택이었다. 13세의 어린 소녀가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 큰 저택에서 느꼈을 외로움과 적막함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부부관계는 불행하게도 원만하지 못했다. 신랑ㆍ신부는 15세가 넘어야 초야를 치를 수 있었는데 정순공주는 16세때 첫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이듬해 공주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2년 후 아버지 태종이 사망했다. 연이은 초상에 공주는 부부생활을 못했다. 유교식 3년상 동안에는 부부생활이 금지된 탓이다. 장모가 사망했을 때 19세였던 남휘는 공주가 탈상하는 동안 쌍륙이라는 노름에 빠졌다. 얼마나 심각한 도박 중독이었느냐면 빚을 세종이 갚아줘야 할 처지였고, 세종이 남휘에게 공주의 병환을 물었을 때 남휘는 아내가 아픈 줄도 몰랐다. 당연히 오빠인 세종은 크게 화가 났을 것이다. 세종은 남휘를 꾸짖었고 여기에 반발한 남휘는 남편이 죽은 지 100일도 안 된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 세종은 손을 들었다. 결국 정선공주는 세종 6년 딸 하나를 더 낳고 21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여동생의 죽음에 세종은 “심장과 간장을 베듯 아프다”고 했다. 후에 공주의 아들에게서 남이 장군이 태어났고, 딸에게서는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숙권이 태어났다.

3년상에 발목을 잡혀 결혼생활을 망친 공주가 또 있다. 바로 문종의 딸이며,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다. 역시 삶은 순탄치 않았다. 홀아비 문종이 싸고돌아 16세가 되어서야 혼처 물색에 나섰는데 할아버지(세종)가 승하하면 3년간 혼인이 금지되는 탓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혼처를 잡았음에도 세종이 급작스레 승하하며 18세에 결혼한 공주는 연이은 쿠데타와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양위를 거치며 부부가 바로 유배를 갔다. 유배 중에 임신했지만 미친 남편은 세조를 자극해 능지처참을 자처했고, 공주는 관비가 되었다가 이후 출가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태어난 116명에 달하는 왕의 딸 중 마지막 덕혜옹주까지 순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결국 행복의 정의를 되묻게 하는 대목이다.

 

최지희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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