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홈 뉴스
윤승호의 jazzy한 인생 <2>
기사입력 2011-10-24 09:56:23.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재즈의 전설 이봉조는 우상…한국음악 스탠다드화 실천  

   
“사라져간 전설 이봉조, 살아 있는 전설 이판근, 그리고 그의 후예 호세윤이 함께 벌인 이 진귀한 재즈의 굿판은 한국적 재즈의 사명을 환기시키는 소중한 도전이다.”

 재즈 평론가 남무성의 ‘호세윤밴드, 이봉조 헌정앨범’에 대한 평이다.

 이봉조 선생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한국의 대중가요계에 다양성을 부여한 불세출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였다. ‘트로트’. 소위 ‘뽕짝’ 음악이 주류이던 시절, 그는 ‘재즈 화성’을 가요에 최초로 접목시킨 뮤지션이다.

 같은 시대, 한국에 재즈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 이판근 선생이다.

 오사카 출생으로 서울대 상과 졸업 후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연주생활을 시작한 그는 오늘날 재즈 이론가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재즈에서 ‘스탠더드’라 함은 ‘서머타임’과 같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곡들을 말한다.

 재즈 목록에 한국노래가 없음을 늘 아쉬워해 왔던 이판근 선생의 제자인 나는 그의 여망인 ‘한국음악의 스탠더드화’를 실천하기로 마음 먹고 주저없이 ‘이봉조’의 음악을 작업하기로 했다.

 1960년대,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갈대의 순정’과 ‘갑돌이와 갑순이’ 틈에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는 대중에게 분명 색다른 음악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멜로딕 라인’에서 탈피한 색소폰 즉흥연주(improvisation)는 이봉조의 또 다른 매력이었으며 그의 수려한 외모 역시 대스타가 되는 데 일조했다고 본다.

그런 이봉조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나의 우상이었다. 60년대 중반 KBS TV 어린이 합창단원이었던 나는 설 명절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께 ‘설날’ 노래를 불러드리러 청와대로 갔고, 생신 때는 ‘대통령 찬가’라는 곡을 부르러 ‘중앙청’으로 가곤 했다.

 그런 활동 덕에 남산 방송국 안팎에서 나는 이봉조 선생을 목전에서 여러 차례 뵐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친구들은 의사, 판사를 장래의 꿈이라 했을 때 나는 다음에 커서 ‘이봉조’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릴 적 음악이 좋아 피아노레슨을 받겠다고 어머니께 졸라본들 먹고 살기도 버거웠던 시절에 그게 가능했을 리 없었다.

 나는 결국 운명적으로 학교선생이 되고 말았다. 1980년 전후에 걸쳐 격랑의 역사가 무겁게 진행되고 있던 무렵에도 나는 모든 상황을 무시한 채 장발에 베이스기타를 걸머메고 철없이 음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훗날 느닷없이 대학교수가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 중간과정은 내가 재즈를 공부하게 된 계기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 기회에 얘기하려 한다.

 ‘연구방법론’이라는 스포츠이론 교수로 20년 넘게 있으면서 음악활동을 틈틈이 해왔던 나는 어느 시점에서 문득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준비해 왔던 작ㆍ편곡, 색소폰연주, 음반 프로듀서로서의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내놓은 작품이 ‘호세윤밴드’다. 이런 나를 보고 교수로서의 품위를 손상한다는 우려를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나는 스스로 반문했다. 법대교수가 서예전 한다면? 그들 생각을 대중예술에 대한 ‘구한말적인 편견’이라 규정하고 이제껏 그래왔듯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음악프로듀서 성균관대 교수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건설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 보시고 실시간 입찰정보도 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건설경제i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구글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구글
인쇄
팝업뉴스 닫기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