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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다시, 안개의 계절이다

   

영상은 안개가 자욱한 숲을 보여준다. 나무들의 절반은 거의 지워져 수묵화처럼 그윽하다. 숲 사이로 난 희미한 오솔길 위쪽에서 잿빛 바랑을 짊어진 노스님이 내려온다. 안개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이 평화롭다. 아래쪽에서는 등산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푸른 배낭을 메고 오른다. 걷는 듯, 둥둥 떠가는 듯,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쪽을 향해 천천히 사라진다. 흐릿한 그림을 흔들며 새소리가 맑게 흩어진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면 내가 태어나 살던 고향 마을은 지독한 안개에 잠겼다. 밤새 어둠 속으로 흘러가던 강은 아침이면 안개를 피워 마당 안까지 들이닥쳤다. 대청에 서서 바라보는 담 너머 강과 산, 하늘과 신작로도 뿌연 안개에 먹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안개. 세상을 다 지우는 힘 센 안개. 나는 마치 주술에 걸린 듯 대문 밖을 들락거렸다. 안개가 만들어 낸 세계에 눈도 귀도 먹힌 채 끌려 다녔다.

 

 그날 아침도 안개가 두터웠다. 학교 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잔뜩 웅크린 나 혼자 안 보이는 길 위에서 더듬거렸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무엇이 나타나면 어쩌지. 두리번거리며 헤맬 때다. 붉은 빛이 불쑥불쑥 안개를 열고 드러났다. 겁 먹지 마라. 길도 집도 학교도 이 속에 다 있다. 잘 익은 감들이 말을 걸었다. 곧 등 뒤로 햇살이 퍼졌고 뚫린 안개는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감을 잡았다. 안개는 어린 내게 그만 읽혀버렸다.

 

 사방이 먹먹하게 먹힌 날엔 잠시 제 자리에 멈추는 게 답이다. 그러면 느닷없이 만난 모퉁이에서 먼 종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희미하게 새 그림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는 일이 그렇다. 가끔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무엇을 걱정하는가. 우린 이미 안개의 독법을 알고 있다. 안개가 짙을수록 날은 더 쾌청하다.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지고 막막했던 만큼 달라진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다시, 오감을 열자. 안개의 계절이다.

 

권 애 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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